또 다른 전쟁, 가난...
아침마다 어린 목동들이 수많은 소 떼들을 몰고 드넓은 초원 위를 가로지르는 아프리카가 나를 맞이한다. 그러나 오랜 내전으로 인해 곳곳에서 신음하는 또 하나의 아프리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수단, 바로 이곳이 내 마음을 설레게도, 동시에 아프게도 만든다. 월드비전 한국에서 지원하는 남부 수단 재건 및 복구 사업의 하나로 톤즈(Tonj) 지역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보건의료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3개월간 이곳에 파견되었다.
수단은 지난 수십 년간 이슬람계 아랍인 중심의 북부 정부와 기독교계 아프리카인 중심의 남부 수단 간에 참혹한 내전이 진행되었다. 수많은 아동들과 무고한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의 국내유민이 곳곳을 떠돌아 다녀야만 했다. 다행히 오랜 내전은 2005년 북부 정부와 남부 수단 간의 평화협정 체결로 지금은 하루하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하지만 남부 수단은 지금 또 하나의 전쟁을 치루고 있다. 바로 가난이라는 거대한 적과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겨우 하루 한 끼, 그것도 대부분을 땅콩으로 해결하며 오늘도 굶주린 배를 움켜진 채 잠이 든다. 제대로 된 의료시설이 없어 눈앞에서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마실 물이 없어 웅덩이에 고인 오염된 물로 아이들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의 갈증을 해결하고 있다. 교실 하나 없어 오늘도 나무그늘아래 흙바닥에서 아이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곳곳에서 너무나 많은 신음소리들이 들려온다.
아댕을 처음 만난 것은 월드비전이 영양실조 아동들을 대상으로 치료영양식 제공 및 예방접종을 실시하는 야외현장에서였다. 수많은 아동들 가운데 조그만 보자기에 싸여 아빠 품에 안겨있는, 도저히 두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너무나 작은 몸의 아댕을 발견했다. 생후 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엄마를 잃고 아빠의 거친 손길만으로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해온 아댕, 모유수유를 할 수 없어 근근이 이웃집에서 동냥한 소젖만으로 끼니를 해결해온 아댕, 그래서인지 극심한 영양실조에 고열, 설사, 구토 등 심각한 합병증이 있어 보였다.
인근마을에 극심한 영양실조 아동들의 입원치료를 목적으로 월드비전이 운영하는 안정화센터로 급히 후송했다. 이동하는 차안에서 불덩이가 된 몸을 들여다보며 안타까워하고 있던 그 순간 아댕이 그 조그만 손으로 내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 좀 전까지 생사가 불투명해 보이던 아이의 힘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압력이 느껴졌다. 마치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간절한 몸부림인 것 같아 그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조그만 생명이 겪어야 했을 지난 2년이란 시간이 너무나 야속하기만 했다. 이동하는 내내 ‘하나님, 이 아동만큼은 꼭 살려주세요!’ 라고 마치 주문처럼 반복해서 기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안정화센터에 도착하자마자 몇 가지 검진을 마친 후 깨끗한 물을 먹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할 정도의 물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벌컥 벌컥... 두 살도 채 안된 아이가 내는 소리라고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혹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벌컥 벌컥... 분명 눈앞에 있는 아댕이 내는 소리가 분명했다.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 아댕은 건강이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가고 없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아댕이 곳곳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지금 이들은 가난이라는 또 하나의 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런데 이 가난이라는 적보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처참한 현실들로 인해 이들 스스로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정말 두렵다. 부모가 자녀에 대한 희망을, 자녀가 부모에 대한 희망을, 서로가 서로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잃어가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혹이라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나 역시도 이들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될까봐 두렵다.
그런데 이 거대한 적을 상대로 한 전쟁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나 둘 승리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땅의 회복을 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을 희생하며 최선을 다해 헌신하는 수많은 NGO들을 통해 희망을 본다.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몇 시간을 쉼 없이 달려온 부모들을 통해 희망을 본다. 자신도 넉넉하지 못하지만 주변의 더욱 굶주린 이들에게 서슴없이 가진 음식을 건네는 이들을 통해 희망을 본다. 나무그늘아래 흙바닥이 학교의 전부이지만 이른 새벽부터 몇 시간을 걸어와 공부하는 아이들을 통해 희망을 본다. 오늘도 이들을 통해 그리도 목말라했던 희망을 발견해가고 있다.
낮부터 강한 비바람을 동반한 짙은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덥고 있다. 사람들의 발길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이 먹구름이 지나가면 오늘 밤엔 더욱 더 맑고 밝게 빛나는 밤하늘의 수 많은 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따라 남부 수단 톤즈의 아름다운 밤 하늘이 더욱 기댜려 진다.
2008년 10월 남부 수단 톤즈에서...